가자 가자
“가자 가자”
열심히 조른 덕분에 자동차 면허가 있고, 영어를 잘하는 제이슨을 꼬실 수 있었다. 제이슨은 친구가 그렇게 좋아하는데 인생에 한 번뿐인 순간을 같이 해줄 수 있다고 마음을 먹은 듯 보였다. 약삭빠른 오나타이는 자기가 조르면 제이슨이 들어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둘은 고등학생 때 처음 만났다. 오나타이가 밴드를 만들려고 제이슨에게 말을 걸었다고 했다.
“ 너 기타 친대매 ”
“ 어, 치지 ”
“ 치는 거 보러 놀러 가도 돼? “
“ 그래, 우리 교회로 놀러 와 “
얘기를 듣던 내가 웬 교회냐고 물었다. 당시에 악기를 하는 애들은 교회를 다녔다고 했다. 교회를 다니다가 악기를 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악기가 하고 싶어서 교회에 가는 애들도 많았다고. 교회는 연습을 할 수 있는 공간과 앰프 같은 장비가 준비된 열려있는 합주실이었다. 게다가 어디서도 만날 수 없는 귀한 드럼이 있었으므로 밴드를 꿈꾸는 친구들이 모여들 수밖에 없었다. 오나타이는 제이슨네 교회에 가서 기타 연주를 듣고 잘 친다며 같이 밴드 하자고 제안했다. 그렇게 만든 밴드는 이후 꾸준하게 합주를 했지만, 같이 무대에 서자는 꿈은 이루지 못하고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대학교에 가서도 둘은 각자 대학의 밴드부에 들어갔다. 이따금 오나타이가 제이슨을 만나서 기타는 계속 칠 거라는 제이슨의 다짐을 듣고 오기도 했지만, 제이슨은 곧 호주로 떠났다.
“ 호주에 왜 가냐 제이슨 “
“ 내가 곰곰아 생각을 해봤는데 오나타이 “
“ 응 “
“ 졸업하고 이대로 취직하면 있잖어, 부모님도 연세 드시지, 한국에서 하고 싶은 건 못할 거여.
호주는 영주권 받으면 노후 걱정은 없다더라. 병원비도 무료고. “
“ 그래서 뭔디 “
“ 기타 치면서 살려고, 그래서 호주 갈라고 “
호주에 간 제이슨과 가끔 통화해보면 일을 하면서도 기타를 치고 있다고 했다. 현재는 대학에 다니며 비자 발급에 수월한 요리를 전공하고 있는데, 나중에 자리 잡으면 기타 전공으로 다시 대학에 가고 싶다고도 했다.
수년이 흐르고 30세 5월에 오나타이와 나는 호주 워킹 홀리데이 비자를 받았다. 비자를 받을 수 있는 마지막 해였다. 제이슨에게 줄 선물로 Moollon 기타를 준비했다. 왜 많은 기타 중에서 물론 기타로 가져가냐고 물으니, 이게 한국 브랜드인데 잘 만든 기타라며, 제이슨이 치면 좋아할 거 같다고 했다. 그렇게 제이슨이 있고 겨울이 오는 멜버른에 가서 겨우내 낮엔 일하고, 저녁엔 제이슨네 가라지에서 술을 마시며 물론 기타를 치며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오나타이와 내가 캡숑 좋아하는 밴드 The National이 세계투어를 하는데 호주에서도 공연한다는 게 아닌가? 소식을 듣고 티켓을 검색해보니 이미 우리가 거주하는 멜버른의 거대한 공연장 티켓은 대부분이 팔린 상태였다. 남은 좌석은 유튜브 라이브를 핸드폰으로 보는 정도로 무대가 작게 보일 거였다. 아 이번이 아니면 살면서 언제 볼 수 있을지 모르는 데 이대로는 안 된다. 좋은 방법이 없을까 하고 필살의 궁리를 하다가 묘수를 떠올렸는데 애들레이드에 가서 공연을 보는 방법이었다. 애들레이드는 멜버른 옆 주에 있는 도시다. 멜버른과는 726.9km 떨어져 있다. 서울에서 부산의 거리 325km니까 서울 부산을왕복하고 평택에 가야 떨어지는 거리였다. 그렇지만 애들레이드는 멜버른에 비하면 한산한 도시이고, 공연장은 오래된 극장 정도의 크기여서 가장 뒷자리에서 보더라도 생생하게 보일 것이고, 게다가 예매율이 낮았다. 상상 이상의 황홀한 컨디션이었다. 그렇게 해서 The National 애들레이드 공연을 보러 가자고 제이슨을 꼬시게 되었고, 제이슨의 수락으로 우리는 여름과 함께 다가온 공연 전날 애들레이드로 출발할 수 있게 되었다.
가는 길은 영화에서 보던 자동차가 한 대 없는 고속도로였다. 도로를 빼고는 나무, 바위, 흙 등으로 구성된 자연 풍경이 보였다. 시선이 닿는 가장 먼 곳엔 지평선이 보였다. 살면서 언젠간 보고 싶었던 지평선을 보며 우리는 어두워질 때까지 달렸다. 그렇게 오래 지표면 위를 달리는 건 태어나서 처음 하는 경험이었다. 그래서인지 단지 오래 달리는 것뿐이었지만 의미 있는 일 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제이슨은 더 어두워지면 빛을 보고 차를 향해 뛰어드는 캥거루 때문에 위험하다며, Power Nap Area에 텐트를 치자고 했다. 우리는 여길 꿀잠 구역이라고 불렀는데, 이곳은 화장실과 식수를 제공해서 텐트를 치고, 라면을 끓여 먹고, 간단하게 씻고 자기에 제격이었다. 일어나서 다시 달리기 시작한 다음 날도 풍경은 어제와 비슷한 풍경이었는데 봐도 봐도 지겹지 않았다. 애들레이드엔 다행히 계산한 시간에 도착했다.
공연이 끝나면 어두운 밤이 되니까 근처에 있는 해변의 캠핑장을 찾아서 미리 텐트를 치기로 했다. 어디서든 파도 소리가 들리는 곳이었다. 바닷 바람에 텐트를 고정한 핀들이 빠지고, 부속품들이 날아다녀서 주우러 다녀야 하는 수고가 있긴 했지만. 텐트를 치고 배를 채운 다음 목표지였던 The National 공연장에 갔다. 공연장 가는 길에 붙은 포스터를 보면서 오늘 정말로 The National 공연을 하는지 확인했다. 확인하고도 믿기지 않는 기분이 들었다. 설레었다. 우리는 일제히 밴드 티셔츠를 사서 갈아입는 거로 기분을 내고, 맥주를 마시면서 공연을 봤다. 거기 있는 사람들 모두 맥주를 마시고 있었고, 우리도 축배를 들듯 맥주를 들이켰다. 그렇다, 이 공연을 보기 위해서 그 긴 길을 달려왔다. 공연을 조금 더 가까이에서 보겠다고 726.9 km 나 되는 먼 길을 달려온 건 멍청이 같은 짓이지만 내가 살면서 했던 것 중 가장 의미 있는 일처럼 느껴졌다. 앵콜곡은 Vanderlyle Crybaby Geeks였다. 멤버가 모두 무대 앞에 나란히 섰고, 드럼은 탬버린을 치고, 기타는 통기타를 치고, 나머지 멤버는 손뼉을 치면서 노래를 시작했다. 관객들이 박자에 맞춰 발
을 구르기 시작했다. 공연장은 나무로 된 마룻바닥이었는데 발을 구르면 천장까지 소리가 울렸다. 공연장에서만 구현될 수 있는 아름다운 사운드였다. 공연이 끝나고 얼마나 신났었는지, 싸인을 받으려고 1시간가량 멤버 대기실 입구에 쭈그려 있었는데도 다 마냥 재밌었다.
텐트로 돌아가는 데 운전석 앞에 큰 달이 낮게 떠 있는 게 보였다. 자세히 보니 달이 점점 지고 있었다. 해변에 도착해서 바다로 달려가보니 달이 바다에 닿을 정도로 내려와 있었다. 그러다가 수평선 밑으로 사라졌다. 가만히 서서 사라지는 모습을 봤는데, 그런 과정을 바라보는 기분은 상당했다. 우린 맥주와 W를 챙겨서 해변으로 갔다. 당시의 호주는 야외에서 술을 마시고 W를 하는 게 불법이라서 가로등이 없는 쪽에 자리를 잡았는데 그 덕분에 별이 무척 많이 보였다.
이러했던 여정도 시간이 지나니 몇 년 전에 일어난 ʻ추억ʼ이 되었다. 제이슨은 결혼했고, 이제 기타를 안 칠 거라고 했다. 오래도록 절대적인 진리로 여겨지는 것이 변경되었는데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지냈다. 오나타이는 한국에 돌아와 밴드를 만들어 앨범을 냈고, 그 사이에 The National은 두 장의 정규 앨범을 냈다. 나는 뮤직 펍을 차렸고, The National 앨범이 나올 때마다 우리가 떠났던 도로와 지평선과 꿀잠 구역과 발 구르는 소리와 수평선으로 사라지던 달을 떠올렸다. 우리는 매일 저녁 모였던 가라지를 빠져나와 뿔뿔이 흩어졌다. 그렇게 그 시절이 완전히 마무리되었다.
며칠 전에 The National이 올겨울에 호주 투어를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우리는 그때보다 많이 달라졌지만, 공연 소식은 그때처럼 찾아왔다. 두근거렸다. 얼마 전부터 호주도 W를 하는 게 합법이 되었다는 소식도 들었는데 마치 그 세계의 입구가 활짝 열렸고 나를 불러 들이는 기분이었다. 호주에 가고 싶다는 말만 입버릇처럼 했는데 이번 겨울엔 정말 가야겠다. 가서 오래 멈춰 서있던 정지선을 넘어봐야겠다. 이번엔 내가 가자 가자고 해야겠다.
주제 : 기억 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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