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가 고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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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로를 이탈했습니다.

 



5학년 때 반 아이들과 함께 아침 기차를 타고 군산에 가기로 했다. 당시 군산은 대천역에서 장항선을 타고 마지막 역인 장항에 내린 다음 근처 항구에서 배를 20분 타면 도착하는 동네였다. 그날 나만 역에 늦게 도착했고, 선생님께 부탁받은 역무원 아저씨께서 이제 오는 비둘기호를 타고 장항역까지 가면 모두가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알려줬다. 기차에 올랐다. 혼자 그 정도의 이동을 해본 적이 없었던 12살 초딩은 동화책에서나 보던 모험이 시작될 거라는 생각을 했다. 아마도 그래서 쓰기 시작했던 거 같다. 이제 모험이 시작되니까. 느린 속도로 달리는 비둘기호 안에서 스프링 노트 몇 장을 글로 채운 기억이 난다. 그에 비해 노트에 뭘 썼는지, 이후 어떤 일정을 보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집에 와서 아빠한테 보여주니 아빠가 소리내 내 글을 읽었던 기억뿐.

그다음의 기억은 고등학교 때. 눈이 오는 날이면 좋아하는 애에게 편지를 썼다. 평소에 좋아하는 티를 낸 적이 없고, 답장을 기대할 사이가 아니었는데 눈이 오면 눈이랑 닮은 그 애가 펑펑 생각나서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너무 꽉 차서 넘칠 것 같은데 쓰면 좀 덜어질 것 같았다. 편지를 다 쓰고 나면 손바닥에 그 애의 이름을 적고 꼭 쥐었다 폈다 하면서 그 애를 보듯 내리는 눈을 봤다. 이때도 뭐라고 썼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나마 기억이 나는 건 주체 못 해서 쓰고도 좋아하는 티 나는 내용은 쏙 뺐던 것. 그랬는데도 티가 나서 대부분의 편지는 주지 못했던 것. 그나마 참지 못하고 티를 냈던 유일한 말은 눈이 와서 생각이 나더라. 그래서 편지를 써. 정도였던 것.

다니던 고등학교에선 기차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달린 호 수만큼 덜컹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를 세면서 듣는 걸 좋아했다. 1분단 두 번째 줄, 왼쪽에 앉으면 지나가는 기차도 보였는데, 그쪽에 앉을 때면 기차가 없어도 창밖을 자주 바라봤다. 사는 게 너무 외롭고 막막한데, 기차 소리를 들으면 어디론가 떠나는 상상을 시작하게 돼서, 다른 감정이 뒤로 밀려났다. 그럼 숨이 좀 쉬어졌다. 장항선은 배차 간격이 멀어 지나는 시간을 외우고 있었는데, 그래서인지 중간중간 불규칙적으로 지나는 화차에 더 마음이 뛰었다. 화차는 길이도 제각각이라 덜컹거리는 횟수가 객차와 달랐다. 두 대가 연속으로 지나갈 때도 있고, 한두 개만 달려서 소리가 금방 끝날 때도 있다. 화차는 갑자기 내리는 눈 같았다. 그땐 다이어리를 펴서 나에 대해 글을 썼다. 잠깐 숨이 쉬어지던 그때 글이 써졌다.

예정된 장항에 도착해서 합류하기보단 진짜 모험이 시작되길 바랐다. 열심히 숨겼지만 좋아한다는 걸 들키고 싶었다. 그리고 교실을 뛰쳐나와 기차를 타러 가고 싶었다. 내가 가던 길이 아니라, 경로를 이탈하고 싶었다. 그게 뭐라 썼는지는 몰라도, 언제 썼는지 기억을 하는 이유일까. 그럴 때 글을 썼던 걸까.




 

주제 : 내가 처음 썼던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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