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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자 가자

 

 


“가자 가자”

열심히 조른 덕분에 자동차 면허가 있고, 영어를 잘하는 제이슨을 꼬실 수 있었다. 제이슨은 친구가 그렇게 좋아하는데 인생에 한 번뿐인 순간을 같이 해줄 수 있다고 마음을 먹은 듯 보였다. 약삭빠른 오나타이는 자기가 조르면 제이슨이 들어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둘은 고등학생 때 처음 만났다. 오나타이가 밴드를 만들려고 제이슨에게 말을 걸었다고 했다.

“ 너 기타 친대매 ”
“ 어, 치지 ”
“ 치는 거 보러 놀러 가도 돼? “
“ 그래, 우리 교회로 놀러 와 “

 

얘기를 듣던 내가 웬 교회냐고 물었다. 당시에 악기를 하는 애들은 교회를 다녔다고 했다. 교회를 다니다가 악기를 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악기가 하고 싶어서 교회에 가는 애들도 많았다고. 교회는 연습을 할 수 있는 공간과 앰프 같은 장비가 준비된 열려있는 합주실이었다. 게다가 어디서도 만날 수 없는 귀한 드럼이 있었으므로 밴드를 꿈꾸는 친구들이 모여들 수밖에 없었다. 오나타이는 제이슨네 교회에 가서 기타 연주를 듣고 잘 친다며 같이 밴드 하자고 제안했다. 그렇게 만든 밴드는 이후 꾸준하게 합주를 했지만, 같이 무대에 서자는 꿈은 이루지 못하고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대학교에 가서도 둘은 각자 대학의 밴드부에 들어갔다. 이따금 오나타이가 제이슨을 만나서 기타는 계속 칠 거라는 제이슨의 다짐을 듣고 오기도 했지만, 제이슨은 곧 호주로 떠났다.

 

“ 호주에 왜 가냐 제이슨 “
“ 내가 곰곰아 생각을 해봤는데 오나타이 “
“ 응 “
“ 졸업하고 이대로 취직하면 있잖어, 부모님도 연세 드시지, 한국에서 하고 싶은 건 못할 거여.
호주는 영주권 받으면 노후 걱정은 없다더라. 병원비도 무료고. “
“ 그래서 뭔디 “
“ 기타 치면서 살려고, 그래서 호주 갈라고 “

 

호주에 간 제이슨과 가끔 통화해보면 일을 하면서도 기타를 치고 있다고 했다. 현재는 대학에 다니며 비자 발급에 수월한 요리를 전공하고 있는데, 나중에 자리 잡으면 기타 전공으로 다시 대학에 가고 싶다고도 했다.

 

수년이 흐르고 30세 5월에 오나타이와 나는 호주 워킹 홀리데이 비자를 받았다. 비자를 받을 수 있는 마지막 해였다. 제이슨에게 줄 선물로 Moollon 기타를 준비했다. 왜 많은 기타 중에서 물론 기타로 가져가냐고 물으니, 이게 한국 브랜드인데 잘 만든 기타라며, 제이슨이 치면 좋아할 거 같다고 했다. 그렇게 제이슨이 있고 겨울이 오는 멜버른에 가서 겨우내 낮엔 일하고, 저녁엔 제이슨네 가라지에서 술을 마시며 물론 기타를 치며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오나타이와 내가 캡숑 좋아하는 밴드 The National이 세계투어를 하는데 호주에서도 공연한다는 게 아닌가? 소식을 듣고 티켓을 검색해보니 이미 우리가 거주하는 멜버른의 거대한 공연장 티켓은 대부분이 팔린 상태였다. 남은 좌석은 유튜브 라이브를 핸드폰으로 보는 정도로 무대가 작게 보일 거였다. 아 이번이 아니면 살면서 언제 볼 수 있을지 모르는 데 이대로는 안 된다. 좋은 방법이 없을까 하고 필살의 궁리를 하다가 묘수를 떠올렸는데 애들레이드에 가서 공연을 보는 방법이었다. 애들레이드는 멜버른 옆 주에 있는 도시다. 멜버른과는 726.9km 떨어져 있다. 서울에서 부산의 거리 325km니까 서울 부산을왕복하고 평택에 가야 떨어지는 거리였다. 그렇지만 애들레이드는 멜버른에 비하면 한산한 도시이고, 공연장은 오래된 극장 정도의 크기여서 가장 뒷자리에서 보더라도 생생하게 보일 것이고, 게다가 예매율이 낮았다. 상상 이상의 황홀한 컨디션이었다. 그렇게 해서 The National 애들레이드 공연을 보러 가자고 제이슨을 꼬시게 되었고, 제이슨의 수락으로 우리는 여름과 함께 다가온 공연 전날 애들레이드로 출발할 수 있게 되었다.

가는 길은 영화에서 보던 자동차가 한 대 없는 고속도로였다. 도로를 빼고는 나무, 바위, 흙 등으로 구성된 자연 풍경이 보였다. 시선이 닿는 가장 먼 곳엔 지평선이 보였다. 살면서 언젠간 보고 싶었던 지평선을 보며 우리는 어두워질 때까지 달렸다. 그렇게 오래 지표면 위를 달리는 건 태어나서 처음 하는 경험이었다. 그래서인지 단지 오래 달리는 것뿐이었지만 의미 있는 일 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제이슨은 더 어두워지면 빛을 보고 차를 향해 뛰어드는 캥거루 때문에 위험하다며, Power Nap Area에 텐트를 치자고 했다. 우리는 여길 꿀잠 구역이라고 불렀는데, 이곳은 화장실과 식수를 제공해서 텐트를 치고, 라면을 끓여 먹고, 간단하게 씻고 자기에 제격이었다. 일어나서 다시 달리기 시작한 다음 날도 풍경은 어제와 비슷한 풍경이었는데 봐도 봐도 지겹지 않았다. 애들레이드엔 다행히 계산한 시간에 도착했다.

 

공연이 끝나면 어두운 밤이 되니까 근처에 있는 해변의 캠핑장을 찾아서 미리 텐트를 치기로 했다. 어디서든 파도 소리가 들리는 곳이었다. 바닷 바람에 텐트를 고정한 핀들이 빠지고, 부속품들이 날아다녀서 주우러 다녀야 하는 수고가 있긴 했지만. 텐트를 치고 배를 채운 다음 목표지였던 The National 공연장에 갔다. 공연장 가는 길에 붙은 포스터를 보면서 오늘 정말로 The National 공연을 하는지 확인했다. 확인하고도 믿기지 않는 기분이 들었다. 설레었다. 우리는 일제히 밴드 티셔츠를 사서 갈아입는 거로 기분을 내고, 맥주를 마시면서 공연을 봤다. 거기 있는 사람들 모두 맥주를 마시고 있었고, 우리도 축배를 들듯 맥주를 들이켰다. 그렇다, 이 공연을 보기 위해서 그 긴 길을 달려왔다. 공연을 조금 더 가까이에서 보겠다고 726.9 km 나 되는 먼 길을 달려온 건 멍청이 같은 짓이지만 내가 살면서 했던 것 중 가장 의미 있는 일처럼 느껴졌다. 앵콜곡은 Vanderlyle Crybaby Geeks였다. 멤버가 모두 무대 앞에 나란히 섰고, 드럼은 탬버린을 치고, 기타는 통기타를 치고, 나머지 멤버는 손뼉을 치면서 노래를 시작했다. 관객들이 박자에 맞춰 발
을 구르기 시작했다. 공연장은 나무로 된 마룻바닥이었는데 발을 구르면 천장까지 소리가 울렸다. 공연장에서만 구현될 수 있는 아름다운 사운드였다. 공연이 끝나고 얼마나 신났었는지, 싸인을 받으려고 1시간가량 멤버 대기실 입구에 쭈그려 있었는데도 다 마냥 재밌었다.

 

텐트로 돌아가는 데 운전석 앞에 큰 달이 낮게 떠 있는 게 보였다. 자세히 보니 달이 점점 지고 있었다. 해변에 도착해서 바다로 달려가보니 달이 바다에 닿을 정도로 내려와 있었다. 그러다가 수평선 밑으로 사라졌다. 가만히 서서 사라지는 모습을 봤는데, 그런 과정을 바라보는 기분은 상당했다. 우린 맥주와 W를 챙겨서 해변으로 갔다. 당시의 호주는 야외에서 술을 마시고 W를 하는 게 불법이라서 가로등이 없는 쪽에 자리를 잡았는데 그 덕분에 별이 무척 많이 보였다.

이러했던 여정도 시간이 지나니 몇 년 전에 일어난 ʻ추억ʼ이 되었다. 제이슨은 결혼했고, 이제 기타를 안 칠 거라고 했다. 오래도록 절대적인 진리로 여겨지는 것이 변경되었는데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지냈다. 오나타이는 한국에 돌아와 밴드를 만들어 앨범을 냈고, 그 사이에 The National은 두 장의 정규 앨범을 냈다. 나는 뮤직 펍을 차렸고, The National 앨범이 나올 때마다 우리가 떠났던 도로와 지평선과 꿀잠 구역과 발 구르는 소리와 수평선으로 사라지던 달을 떠올렸다. 우리는 매일 저녁 모였던 가라지를 빠져나와 뿔뿔이 흩어졌다. 그렇게 그 시절이 완전히 마무리되었다.

며칠 전에 The National이 올겨울에 호주 투어를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우리는 그때보다 많이 달라졌지만, 공연 소식은 그때처럼 찾아왔다. 두근거렸다. 얼마 전부터 호주도 W를 하는 게 합법이 되었다는 소식도 들었는데 마치 그 세계의 입구가 활짝 열렸고 나를 불러 들이는 기분이었다. 호주에 가고 싶다는 말만 입버릇처럼 했는데 이번 겨울엔 정말 가야겠다. 가서 오래 멈춰 서있던 정지선을 넘어봐야겠다. 이번엔 내가 가자 가자고 해야겠다.

 

 

 

주제 : 기억 no....

 

 

 

 

 

and

 

 

 

엄마는 뭘 좋아했어요?



너무 무겁게 쓰고 싶진 않은데, 한 번도 꺼내 본 적이 없어서 얼마나 무거운지, 꺼내 보면 어떻게 생겼을지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꺼내 보지 않은 게 아니라 꺼낼 일이 없었던 거라서 이 글을 적는 지금, 조금 설레기도 합니다. 유년-기, 幼年期. 사전을 찾아보니 어린이의 성장·발달의 한 단계. 유아기와 소년기의 중간으로 초등학교 저학년, 유치원에 해당하는 시기라고하는데 유년기 이후엔 없었고, 정말 그때만 존재했던 엄마가 강렬하게 떠오릅니다.

 

어디부터 꺼내 볼까, 쉽게 얼굴부터 게임 캐릭터를 설정하듯 그려보자면 아빠는 기본 표정이 ʻ해맑음ʼ으로 일 텐데, 엄마 캐릭은 ʻ피곤함ʼ으로 설정될 거 같습니다. 해가 질 때까지 동생과 집안을 잔뜩 어지르면서 놀다 보면 퇴근해서 돌아온 엄마가 방을 치우기 시작하고, 밥을 차려주셨어요. 당시 마주치는 어른들은 저를 보면 늘 웃어주셨는데, 퇴근한 엄마의 표정은 굳어 있었습니다. 화가 나신 건가 무서워서 엄마 오는 소리가 나면 숨어있기도 했어요. 지금 떠올려보니 그 표정이 피곤한 표정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모든 생계와 육아를 엄마가 하는 동안 아빠는 도대체 뭘 하고 계셨을까요.

 

다정한 목소리가 몇 군데에서 들립니다. 엄마가 데워준 따뜻한 물을 대야에 담고, 그걸 아껴가며 씻었어요. 더 어릴 땐 엄마가 내 얼굴을 문질 문질 마지막엔 킁으로 끝나는 세수를 했고, 좀 더 컸을땐 손, 얼굴, 엉덩이, 발 순서로 씻고 물을 버리면 된다고 가르쳐 주셔서 그 순서대로 씻었습니다. 그래서 어른이 된 지금도 씻을 때 그 순서가 생각이 나요.

 

계란 토스트에서도 엄마 목소리가 들립니다. 엄마는 우유를 넣어 잘 풀어놓은 계란에 식빵을 넣어 흠뻑 적시고, 마아가린을 녹여놓은 뜨거운 프라이팬에 올렸어요. 노릇하게 익은 뜨거운 토스트 위에 설탕을 잔뜩 뿌려서 밥상 위에 주시면 세상에서 제일 맛있다 하면서 우유랑 먹었어요. 지금도 외로운 날이나, 기분 좋아지고 싶을 때 먹는, 제일 좋아하는 간식입니다. 며칠 전에 동생과 같이 계란 토스트를 먹었는데요. 동생이 아 엄마 생각난다. 그래서 나도 그래. 하고 대답했어요.

 

엄마는 어느 날부터 퇴근하고 오시면 가방에서 한지를 꺼내서 장판 위에 쭉 펴놓으셨습니다. 서예 학원에 다니기 시작하셨다며, 쓴 글씨를 보여주셨고, 몇 장은 벽에 붙이며 밝게 웃으셨습니다. 한지에선 먹 냄새가 났는데, 엄마를 웃게 한 그 냄새를 좋은 냄새라고 생각했어요.

 

초등학교 3학년 때는 논산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주인이 1층에 살고, 저희는 2층인 양옥 주택으로요. 이사한 지 얼마 안된 주말, 거실 창문으로 바깥을 봤는데, 눈이 부실만큼 밝은 오전 햇빛에 아직은 눈에 안 익은 낯선 풍경이 밝게 보였고, 그 풍경 속에서 엄마와 아빠가 배드민턴을 치고 있었습니다. 라켓에 부딪히는 셔틀콕이 통 통 소리를 내며 공중을 날아다녔습니다. 그때 엄마 표정은 정말 환했어요. 행복하다고 생각이 들 만큼요. 이사 온 이곳에선 앞으로 이런 풍경만 펼쳐질 것 같았습니다. 그러고 보면 고등학생 때 배드민턴을 정말 자주 쳤었어요. 바람이 불어오는 반대 방향으로 하늘을 향해 셔틀콕을 치면 어느 정도 날아갔다가 다시 나에게 돌아오는데요. 그렇게 돌아오는 공을 되받아치는 걸 좋아했습니다. 어릴 적 엄마의 배드민턴과 고등학생인 나의 배드민턴을 연결해서 떠올리지 않아도, 엄마의 밝았던 표정이 겹쳐져 떠오를 때가 있었어요.

 

그러나 엄마는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아팠고, 입원하셨고, 수술하셨는데 그런 소식들은 우리를 돌봐주러 오시는 할머니나 고모를 통해서 들었습니다. 엄마와 대화할 시간은 거의 주어지지 않았어요. 엄마가 하지 않았던 건지, 제가 기억을 못 하는 건지, 아니면 대화할 시간이 없을 만큼 시간이 다급하게 흘러간 건지 정확하지 않습니다. 엄마의 목소리로 전해졌으면 좋았을 텐데, 더 기억할 수 있을 텐데 적고 나니 아쉽습니다. 엄마는 계속 큰 병원으로 옮겨졌고, 우린 논산에서 대천 친 할머니 댁으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하루는 전학 간 학교를 마치고 집에 가보니 엄마가 와계셨어요. 뜨겁게 데워진 방바닥 위에 두꺼운 이불을 깔고 누워계셨습니다. 밤엔 너무 아프다고 엉엉 우셨고, 나도 같이 울었어요. 다음 날 하교하고 집에 오는 길에 동네 동산에 들러 진달래꽃을 꺾었습니다. 엄마가 이걸 보고 좋아하시면 좋겠다는 마음으로요. 다행히 엄마가 예쁘다고 좋아하셨고, 이후로도 이날 보신 진달래 얘기를 몇 번 하셨어요. 그때는 진달래꽃에게 고마웠고, 지금은 진달래꽃을 보면 아픈 엄마의 모습이 떠올라서 좀 쓴 맛이 납니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학교 친구들, 선생님 사이에서 ʻ엄마 돌아가신 애ʼ가 되었습니다. 다들 어려워하고, 위로를 해줬는데, 사실 저는 그만큼 슬프지 않았습니다. 흔하게 영화나 드라마에서 나오는 것처럼 엄마 생각을 하면서 울다가 잠드는 적도 없었어요. 자라는 동안에도 엄마 생각에 슬퍼하는 일은 아주 적어서 슬퍼하지 않는 내가 좀 이상한가? 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몇 년 전부터는 내게는 있지만, 아빠에게는 없는 특징을 보면 그렇다면 이런 점은 엄마를 닮은 건가? 하고 생각을 해봅니다. 기억하려고 애는 썼지만요, 엄마를 잘 모르겠어요. 유년기 시절에만 존재했던 엄마를 기억하는 건 한계가 있습니다. 새로운 사실은 더 생겨나지 않고, 엄마에 대해 깨달을 기회도 생기지 않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살아있는 사람들은 그 사람에 관해 얘기하는 것을 중단하니까, 더는 알 기회가 사라집니다.

 

그게 당연한 건 줄 알고 자랐어요. 얘기를 꺼내면 슬프니까 꺼내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자라서 지금에 와보니 엄마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는 걸 알았습니다. 피곤한 얼굴, 계란 토스트, 씻겨주시던 모습, 먹 냄새, 배드민턴, 진달래 같은 제가 기억하려 애써서 지켜낸 것만 알고, 나머지는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제가 자랄 때 엄마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엄마에 대해 많이 얘기해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엄마가 좋아했던 음식을 먹게 되면 이건 엄마가 좋아했던 거야. 하고 얘기해주고, 엄마가 좋아했던 영화를 알려주고, 엄마가 좋아했던 음악을, 엄마와 갔던 장소를, 엄마의 최애 소설을, 엄마의 장점과 단점을, 엄마랑 있었던 재밌었던 일을, 엄마의 실수를, 엄마의 꿈을 제게 얘기해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빈약한 사실만 제게 남아있어서 어쩌면 죽음이 엄마를 소멸시킨 것보다는, 죽음과 동시에 사람들 사이에서 소멸한 것이 더 가슴 아픕니다. 죽는 건 어쩔 수 없이 슬픈 일이고, 슬픈 걸 쉽게 대할 수 없지만, 슬프더라도 죽은 사람에 대해 자주 얘기하면서 서로에게 살아있는 모습을 목소리로, 감정으로, 공기 중에 퍼지는 냄새로 불러일으켜 지면 한 사람의 역사를 오래 지켜가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엄마가 기억 속에 다채롭게 살아있었다면 엄마가 살았던 나이를 내가 지날 때 어릴 때 못했던 더 많은 공감을 해볼 수 있었을 텐데, 큰 아쉬움이 남습니다. 유년기 보다 많이 자란 나는 이제 무엇이 더 즐거운 방향인지를 알고 있습니다. 엄마의 죽음 이후에 제게 아무도 묻지 않아서 꺼낼 일이 없었던 엄마의 이야기를 이제는 제가 꺼내 봐야겠어요. 엄마는 뭘 좋아했어요? 하고요.

 

 

 

 

주제 : 유년기를 떠올리면 생각나는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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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

 

소사나무

 



아빠는 물을 가득 채운 빨간 대야에 소사나무 화분을 담갔다. 초딩 고학년이던 내게 소사나무는 국화, 코스모스보단 난이도가 있는, 고학년 정도의 어른이 되어야 아는 나무라고 생각했고, 그 난이도 때문에 나무에 더 호감이 갔다. 그 당시엔 하교해서 집에 오면 아빠 방에 가서 억지로 공부를 했다. 아빠는 내과 의사보다는 아무래도 미래에는 치과 의사가 더 전망이 좋을 것 같다며 직업끼리 우열을 견주며 이 문제 저 문제를 풀게 하고, 영어문장을 소리 내 읽게 했다. 아빠가 저렇게 말하는걸 보면 나한테 의사가 될 자격이 있나 본데, 그래도 의사는 되기 싫은데 공부도 하기 싫은데. 몸을 배배 꼬며 억지로 문제집을 풀었고, 아빠는 내 옆에서 소사나무 가지에 돌돌 감아놓은 철사를 이리저리 만지며 모양을 다듬었다.

 

소사나무는 자작나뭇과에 속하고 중부의 해안이나 섬에서 주로 자란다고 한다. 달걀형 잎에는 주름치마 같은 무늬가 있고, 뻣뻣한 질감이라 달걀 광 정도의 광택이 나는 모양새. 나무 겉면은 고목에서나 볼 법한 거친 껍질이 달려있어 실제 나이보다 훨씬 들어 보였다. 한국 특산종이라는데 아빤 이런 사실에 자부심을 좀 느꼈는지 척박한 환경에서도 잘 자라는 한국 토종나무라는 얘길 나무를 돌보는 도중 종종 하셨다. 그런 아빠의 소사나무 가지에는 철사가 감겨있었다. 철사를 움직이는 방향대로 가지 모양을 변경할 수 있다고. 그렇지만 한 번에 확 바꿀 순 없고, 나뭇가지가 적응을 할 수 있을 만큼 조금씩 변경해야 했다. 원하는 모습이 나올 때까지 오랜 시간을 들여야 해서 늘 철사가 감겨있는 상태였고, 철사가 감긴 면을 빼고 나무가 성장하기 때문에 철사를 풀면 가지에 철사 자국이 고스란히 남았다. 나는 패인 부분을 만지면서 아빠 나무가 아프지 않을까요? 하고 물어봤는데, 분재는 원래 이렇게 하는 거라고 하셨다. 사람이면 아플 텐데 나무라고 괜찮을까, 나무에 물어보고 싶다. 뭐 괜찮으니까 감아놓으시는 거겠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아파 보여서 그 모습을 보는 게 싫었다. 여러모로 멋있는 나무인데, 이렇게 홈이 패이면서까지 묶여서 커야 한다니, 그냥 자라는 대로 옆에 두고 보는 게 정말 좋아하는 거 같은데, 아빠가 소사나무를 좋아하는 방법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 학교 끝나고 집에 와보니 아빠가 물을 가득 채운 빨간 대야에 소사나무 화분을 담갔다. 소사나무엔 잎이 다 떨어지고 없었다. 아빠 소사나무가 죽은 거예요? 아빠는 가끔 이럴 때가 있는데, 그럴 때 물에 담가 놓으면 살아난다고 하셨고, 할머니는 나한테만 저거 죽은 거 같은데 저렇게 한다고 살라나, 그렇게 아끼더니 하셨다. 소사나무는 잎이 없는 것 빼고는 이전과 그대로인 모습이었는데도 생명력이 없어 보였다. 신기하다, 저리 미동 없이 죽다니. 다 느끼는 그 사실을 아빠만 모르는지 소사나무는 며칠 동안 빨간 대야에 담겨있었다. 아빠는 매일 마당 수돗가에 서서 한참 동안 소사나무를 바라봤고, 어떤 때는 눈물을 닦으셨다. 나는 마루에 앉아 문제집을 풀면서 그런 아빠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주제 : 화분

 

 

and


질문을 견뎌보는 일


“으악 이게 뭐죠?” 깜짝 놀라서 물었는데, 직접 길러서 건조한 애플민트라며 건네주셨다. “뜨거운 물에 넣어 차로 마셔도 좋고, 입욕제로도 좋아요.” 애플민트. 키우는 화분이 세 개나 있을 정도로 마당 내 화분 점유율이 높은 식물인데, 기르면서 한 번도 차나 입욕제를 떠올려 본 적이 없었다. 웹서핑 중에 얼핏 허브차 활용 방법을 읽었던 기억이 있지만, 부지런하고 슬기로운 누군가의 것으로 생각했지, 그 방법이 내 것이 될 거라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러나 누군가가 오랜 시간 기르고, 건조하고, 곱게 포장해서, 수원에서부터 여기까지 들고 와, 심지어 나를 주려고 들고 와 “뜨거운 물에 넣어 차로 마셔도 좋고, 입욕제로도 좋아요.”라고 말하며 건넨다면, 그 방법은 일직선 최단 거리로 내 것이 된다. ‘애플민트를 사용하는 또 다른 방법이 더 없을까’하고 궁리까지 해보게 된다. 뜨거운 물에 잘 건조된 애플민트 잎을 넣어 마셔보는 생애 최초의 시간. 처음이라 잎을 너무 많이 넣어 쓴맛이 났지만 맛을 보고 기분이 좋았다.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세상의 방법이 내 방법이 되고, 애플민트 차를 마시게 되는 일이 호박이 마차가 되는 마법을 보는 것처럼 놀랍다. 정성을 들인 시간이 나를 위한 거였을때, 밭을 일궈 1년에 한 번만 수확하는 들깨를, 방앗간에서 들기름으로 만들고, 맛있게 먹으라고 내게 주시는 할머니의 마음을 받을 때, 할 줄 모르는데 유튜브 보면서 한번 해봤다며 “언니 이게 프랑스 자수래” 하면서 내 모습이 들어 있는 자수 액자를 받을 때, 여행 갔을 때 내 생각이 나서 샀다는 미지의 세계에서 나랑 닮은 물건을 찾아낸 친구의 마음을 받을 때. 이런 일들이 생기면 마법이 일어난 기분이 든다. 그리고 곧장 들기름으로 먹을 수 있는 가장 맛있는 음식을 찾아내려고 궁리하고, 프랑스 자수는 내가 아는 자수랑 뭐가 다른 거지? 검색을 해보고, 친구가 걸었다는 나라를 나도 가보고 싶다는 최초의 호감을 품어보게 된다.

모르던 걸 알게 되는 일은 쉽게 자주 일어나지만, 알게 되었다고 내 것이 되지는 않는다. 알고 있어야 내 것이 되지만, 좋아하면 내 것이 되기를 시작하는 것 같고. 엉망인 맛이 나는 최초의 애플민트 차를 좋아하게 되는 걸 보면, 제대로 된 맛을 몰라도 좋아하게 되는 것 같고. 좋아하게 된다라, 그럼 언제 좋아지는 거지? 지내면서 생각 해 본 적 없는 좋아지는 순간에 대해 생각해본다. ‘나는 이런 글을 좋아합니다’를 생각하다가 근데 나는 글을 언제 좋아하게 된 거지? 하고 그 이전을 생각하다가 그다음에 적힌 ‘내가 처음 썼던 때’을 읽고, 와 그렇구나. 내가 처음 썼던 때를 떠올려보면 글을 좋아하게 된 때를 찾아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야! 하고 손뼉을 치는 지금, 일요일 글쓰기 모임을 좋아하게 되는 최초의 기분을 느낀다. 좋아하지 않던 걸 좋아하게 되는 건 (좀 표현이 아이같지만) 반짝이는 마법가루가 필요하다. 눈물이 반짝이고, 손뼉을 딱 치고, 발을 동동 구르는 때 마법 가루가 내 주변에 바람처럼 일어나는 기분이다.

‘나는 이런 글을 좋아합니다’ 를 읽은 후 글을 쓰는 지금까지 질문을 견뎌봤다. 글에 대해 생각해보고, 좋아하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고, 글을 좋아하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고, 비로소 나를 붙여서 내게 글은 무엇인지 생각해보고. 그러던 중에 팟캐스트에서 “책은 위로를 해주지 않아요, 더 많은 질문을 던져주지”라는 말을 들었다. 근데 그게 내게는 질문이 좋아지는 순간으로 들렸다. 한 사람이 오래도록 품고 견뎌온 질문을 받는 일. 그 질문을 함께 견뎌보는 일. 그건 아마도 좋아지는 순간이 생겨나는 일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질문을 받는 건 정답을 듣는 것보다 훨씬 힘들지만 훨씬 즐거운 일. 무언가를 좋아하는 시작을 얻는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런 질문이라면 더 많은 질문 속으로 걸어가고 싶다. 그리고 질문을 견뎌보고 싶다. “책은 위로를 해주지 않아요, 더 많은 좋아하는 순간을 던져주지”

 

 

 

 

주제 : 내가 좋아하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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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로를 이탈했습니다.

 



5학년 때 반 아이들과 함께 아침 기차를 타고 군산에 가기로 했다. 당시 군산은 대천역에서 장항선을 타고 마지막 역인 장항에 내린 다음 근처 항구에서 배를 20분 타면 도착하는 동네였다. 그날 나만 역에 늦게 도착했고, 선생님께 부탁받은 역무원 아저씨께서 이제 오는 비둘기호를 타고 장항역까지 가면 모두가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알려줬다. 기차에 올랐다. 혼자 그 정도의 이동을 해본 적이 없었던 12살 초딩은 동화책에서나 보던 모험이 시작될 거라는 생각을 했다. 아마도 그래서 쓰기 시작했던 거 같다. 이제 모험이 시작되니까. 느린 속도로 달리는 비둘기호 안에서 스프링 노트 몇 장을 글로 채운 기억이 난다. 그에 비해 노트에 뭘 썼는지, 이후 어떤 일정을 보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집에 와서 아빠한테 보여주니 아빠가 소리내 내 글을 읽었던 기억뿐.

그다음의 기억은 고등학교 때. 눈이 오는 날이면 좋아하는 애에게 편지를 썼다. 평소에 좋아하는 티를 낸 적이 없고, 답장을 기대할 사이가 아니었는데 눈이 오면 눈이랑 닮은 그 애가 펑펑 생각나서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너무 꽉 차서 넘칠 것 같은데 쓰면 좀 덜어질 것 같았다. 편지를 다 쓰고 나면 손바닥에 그 애의 이름을 적고 꼭 쥐었다 폈다 하면서 그 애를 보듯 내리는 눈을 봤다. 이때도 뭐라고 썼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나마 기억이 나는 건 주체 못 해서 쓰고도 좋아하는 티 나는 내용은 쏙 뺐던 것. 그랬는데도 티가 나서 대부분의 편지는 주지 못했던 것. 그나마 참지 못하고 티를 냈던 유일한 말은 눈이 와서 생각이 나더라. 그래서 편지를 써. 정도였던 것.

다니던 고등학교에선 기차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달린 호 수만큼 덜컹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를 세면서 듣는 걸 좋아했다. 1분단 두 번째 줄, 왼쪽에 앉으면 지나가는 기차도 보였는데, 그쪽에 앉을 때면 기차가 없어도 창밖을 자주 바라봤다. 사는 게 너무 외롭고 막막한데, 기차 소리를 들으면 어디론가 떠나는 상상을 시작하게 돼서, 다른 감정이 뒤로 밀려났다. 그럼 숨이 좀 쉬어졌다. 장항선은 배차 간격이 멀어 지나는 시간을 외우고 있었는데, 그래서인지 중간중간 불규칙적으로 지나는 화차에 더 마음이 뛰었다. 화차는 길이도 제각각이라 덜컹거리는 횟수가 객차와 달랐다. 두 대가 연속으로 지나갈 때도 있고, 한두 개만 달려서 소리가 금방 끝날 때도 있다. 화차는 갑자기 내리는 눈 같았다. 그땐 다이어리를 펴서 나에 대해 글을 썼다. 잠깐 숨이 쉬어지던 그때 글이 써졌다.

예정된 장항에 도착해서 합류하기보단 진짜 모험이 시작되길 바랐다. 열심히 숨겼지만 좋아한다는 걸 들키고 싶었다. 그리고 교실을 뛰쳐나와 기차를 타러 가고 싶었다. 내가 가던 길이 아니라, 경로를 이탈하고 싶었다. 그게 뭐라 썼는지는 몰라도, 언제 썼는지 기억을 하는 이유일까. 그럴 때 글을 썼던 걸까.




 

주제 : 내가 처음 썼던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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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범 소개


“먼동이 트려 할 무렵의 진동, 완태”
깊은 겨울의 숲 속, 지상과 대지의 형상이 구분되지 않는 새벽의 시간엔 온도는 침잠하는 데에, 적막함은 더욱 짙어가는 데에 몰입한다. 그때 어둠을 깨우면서 나타나는 태양 빛은 조용하고 분명한 태도로 숲의 검은 표면을 향해 다가가서 부딪치고 그 내부로 스며든다. 완태의 데뷔EP [노을이]는 이 과정의 풍경 속에 머무르면서 숲의 표면에 발생하는 진동들을 앨범에 고스란히 담아냈다. 빛과 어둠, 외부와 내부, 뜨거움과 차가움, 낯섦과 낯익음이 같은 표면에 닿았을 때 비로소 서로가 구분되고 고유의 모습들이 드러난다는 이 모순 같은 사실에 알 수 없는 위안이 드는 건, 아마도 그 과정이 우리가 어떤 일의 첫 출발을 하기 위해서 용기를 내는 시작과 닮았기 때문일 것이다. 새벽은 하루 중 매우 찰나의 시간이지만, 머무르던 풍경에서 훌쩍 벗어나는 경계선이고, 내부와 다른 온도를 견뎌내며 다음으로 나아가는 과정이다. 완태의 데뷔 EP[노을이]는 이 휘발되기 쉬운 감정의 과정을 깊게 붙들고 매우 두터운 정성의 밀도로 점차 완성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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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에게는 가장 좋은 음악> 추천사

마감하고 혼자 남은 뮤직 펍 테이블에 앉아 읽었다. 그러다 반가운 뮤지션이 나오면 와 오랜만에 들어볼 까. 호기심 가는 뮤지션이 나오면 이건 도대체 어떤 음악일까, 종일 음악을 들었는데도 호기심이 차올랐 다. 장르의 거대하고 보편적인 흐름을 설명하는 동시에 이 장르를 들을 때 일어나는 고유한 즐거움을 함 께 전하는 저자는(표기를 어떻게 할지) 낯선 세계를 분명하고 다정하게 건네는 매개자가 되어 장르의 숲 으로 도착하게 했다. 그래서 책장을 넘기는 건 노래를 계속 틀어 듣게 되는, “바람처럼 불어오는 음악을 맞으며 흔들리는 일”이었다. 어느새 못 배기고 맥주를 한잔 따라 곁에 놓고서 다채로운 리듬에 찰랑거렸 다. 음악 장르를 담담하게 써나간 글인데 마음이 오래 붙잡히는 것은 왜일까. 책을 읽지만, 음악이 잔뜩 말을 걸고, 마음이 출렁이는 여정에 놓이는 이 사랑스러움. 음악에 귀를 기울이게 하고, 몰랐던 음악이 별안간 마음을 채가서 속수무책 좋아하게 만드는 뭉클한 이론서이다.

- 뮤직펍 욜라탱고에서, 최성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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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저 Yo La Tengo Live In Seoul 요 라 텡고 내한공연에 오시는 분들께 드리기 위해 준비한 Gimbab Zine Vol.1 에 2016년 내한공연 리뷰글 썼어요,,,,! 존경심을 담아 헌정하는 책자를 제작하는 김밥레코즈 방향이 넘 좋고, 마음이 두근두근해요!

청탁(입금)을 받고 처음 쓴 글. 글을 잘 쓸 자신이 없다고 하니, 김밥 규원님이 얼마나 좋아하는지 써주시면 돼요! 라고 해주셔서 그건 자신 있어요! 라고 한 후에 2019년에 쓴 2016년 내한 공연 후기 글입니다.

김밥 레코즈 사랑해요. Yo la tengo 또 내한공연 열어주세요~~~~!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다. 해가 지면서 각도가 나랑 잠깐 맞아떨어져 강렬한 빛이 비쳐 눈이 부 셨다. 하루 빛 중에 제일 먹먹하고 울렁울렁 엉울엉울해, 왜 이렇게 마음이 이상하지. 이 빛이 감정이 되면 사랑, 이라고 생각했다. 그 사이에 빛이 갔다.

 

Yo la tengo 공연에서 한 곡이 시작되고 끝날 때마다 들던 감흥은 이랬다. 단지 Yo la tengo를 말도 안 되게 좋아하기 때문에 이런 감흥을 느낀 건 아니다. 분명 아니다. 대전에서 출발할 때부터 공연장에서 첫 번째로 티켓을 교환하는 사람이 될 때까지 비장한 마음이긴 했지만, 춥고 배가 고파서 첫 번째 입장은 도저히 못해 못해, 언제부터 내가 열심히 살았다고. 밥과 맥주를 먹은 다음(!) 중간쯤 입장하는 헐렁한 마음으로 공연을 봤고, (이렇게 말하면 다른 밴드에게 좀 미안하지만) 그동안 좋아하는 밴드의 공연을 본다고 이 정도로 뭉클하진 않았다. 정말로 남다르게 압도적이었다.

 

공연은 두 번의 세트로 나눠 진행됐다. 이건 아이라 카플란이 인터뷰에서 말한 ‘내가 좋아하는 투어의 특징은 두 번의 세트로 공연을 하는 거다. 처음에는 조용히, 꿈꾸듯 연주만 하고, 두 번 째에는 열광하며 놀 수 있는 공연’ 이라던 그 방식이 아닌가! 뮤지션이 좋아하는 방식으로 진행되는 공연이라니 Is that enough oh, is that enough well. 첫 번째 어쿠스틱 세트에선 3가지 색을 부드럽게 섞어 12가지의 꿈결 같은 색을 만들었다면, 두 번째 일렉 세트에선 3가지 색으로 이 세상 온갖 색을 만들어내는 걸 목격하는 기분이었다. 따뜻하고 단순한 멜로디 주변에 가득 찬 노이즈.

 

Yo la tengo를 듣는 이유는 저마다 다르겠지만, 나의 경우는 따뜻한 멜로디 주변에 가득 찬 노이즈를 들으러 플레이한다. 노이즈는 시끄럽다고 생각하던 애송이 시절, Big day coming을 듣고 뭔지도 모르고 그대로 반했다. 단출하게 반복하는 멜로디 주변에 노이즈가 몽글몽글 피어오 르더니 가득 찬 노이즈 입자가 나를 위로하듯 다가오는 절대로 잊지 못할 경험. 이번 공연의 Big day coming는 첫 번째 세트에서 연주되어 다른 맛이 났지만, 그것도 좋았다. 관객들이 소곤소곤 따라 부르는 소리까지 좋았다. 오래도록 Yo la tengo를 들어오면서 주변에 공유하는 데엔 번번이 실패했는데, Yo la tengo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한 장소에 이렇게나 많이 모여, 함께 환호하는 것이 이렇게나 좋을 수가. Nowhere near를 마지막으로 꿈같은 첫 번째 세트가 끝났다. 30 분 정도 쉬고 두 번째 일렉 세트가 시작됐다.

 

2부 첫 곡은 Mr. tough. 와, 이 멜로디는 버스를 눈앞에서 놓친 짜증에도 먹히는 음악인데, 2부 첫 곡이라니. 정말이지 저는 흥청망청 놀 준비가 됐습니다. Yo la tengo의 무대는 다른 공연에서 볼 수 있는 영상, 조명 같은 수식이 없다. 옷차림에도 장식이 없다. 편안한 줄무늬 티셔츠 차림 의 아이라 카플란이 사운드의 공간을 만들어내듯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면 사운드가 폭발하고 나도 폭발했다. 지금 이 공간에서 생성되고 소멸하는 사운드라는 게 마구 전해졌고, 음원으로 는 수도 없이 들어 본 곡을 지금 여기에만 머무는 종류의 사운드로 만나는 경험은 각별했다.

 

Ohm을 연주할 때였나, 한참을 몰입해서 연주하던 노이즈를 잔뜩 머금은 기타를 관객석으로 건넸다. 기타 소리는 여전히 팽창했고, 아이라 카플란은 무대 한쪽에 앉아 당신을 바라보던 우리를 가만히 바라봤다. 나는 당신이 보는 걸 들어요. 그 순간부터 I heard you looking으로 이어 지던 순간은 정말이지 영원히 좋을 만큼 좋았다.

 

공연을 본 후에도 전율이 오래가서 문득문득 눈물이 나려고 그랬다. 뭔가를 넘어서는 공연이 었다. 난 즐거울 땐 욜라탱고를 들어, 라면서 듣고 난 슬플 땐 욜라탱고를 들어, 라면서 듣고 그러다 보니 오랜 세월을 같이 흐르며 살아왔다는 훌륭한 기분이 든다. 동시대를 살아서 기쁘고, 이렇게 공연을 볼 수 있어 기뻤다. 한 달에 한 번은 Yo la tengo 공연을 보며 살고 싶은 기분이지만, 그럴 순 없으니 만날 수 있는 한 또 만나요, Yo la tengo!

 

- 대전에 있는 뮤직펍 욜라탱고에서 꽃성아

 

 

 

 

 

song ah - 20161130 yo la tengo review .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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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말구 글........

후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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