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한가했던 수요일, 일찍 마치고 술자리에 갔다. 술집 이름은 추억 만들기. 도착하니 일행들 눈이 반쯤 풀려 있었다. 기분 좋은 고양이가 짓는 표정처럼. 늦게 합류한 걸 만회하려고 소맥을 연거푸 마셨다. 나도 금세 취했다. 일행들이 핸드폰으로 음악을 틀고 있어, 누구 폰에 스피커를 연결한 거냐고 물으니 사장님이 노래 틀어서 들으라고 자기 폰을 주셨다고. 신박해... 사장님은 노래가 맘에 든다고 조명을 낮추시더니 춤춰! 라고 하고, 디제이처럼 소리가 커졌다 작아졌다 해서 돌아보니까 컨포넌트 오디오 앞에서 볼륨 기를 돌리고 있고. 늦게 들어온 내게 밥 먹었어? 하시더니 조금 남은 밥을 따뜻하게 돌려주시고, 경계라고는 없이 훌쩍훌쩍 뛰어넘는 공간에서 몸이 풀려 옆 일행 어깨에 기대기도 했다, 크게 웃기도 했다, 다른 옆자리 일행이 내 접시에 올려준 소세지를 집어 먹고 눈웃음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다 이런 공간에서도 풀리지 않는 마음이 거슬려 이제 집에 가고 싶다고 크게 말했다. 노래방에 가고 싶다는 일행을 두고 다들 짐을 챙겨 일어섰다.
다음 날 일어나니 몸이 그리 무겁진 않은데, 마음이 어질러져 손에 잡히는 게 없이 시간만 흘렀다. 이건 술 때문이다. 술이 그동안 온전했던 마음을 헤집어 엉망진창으로 만들었다. 오늘은 문을 못 열겠다. 아 진정 이것이 술의 중력이구나.
가게 간 김에 미뤄둔 정리를 하다가, 펜을 사러 에스닷에 갔다. 웃긴 펜들을 샀다. ㄷㄷㄹㄷ 문이 열려 있길래 인사나 할 겸 들렀다가 최승자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 산문책을 발견하고 첫장을 넘겨 읽었다.
![](https://blog.kakaocdn.net/dn/pHa62/btr4qApGoXd/YuzpiT15uyt3l3CLK9E0Gk/img.jpg)
'20대 중간쯤의 나이에 벌써 쓸쓸함을 안다. 깨고 나면 달콤했던 예전의 쓸쓸함이 아니고 쓸쓸함은 이제 내 머릿골 속에서 중력을 갖는다. 쓸쓸함이 뿌리를 내리고 인생의 뒤켠 죽음의 근처를 응시하는 눈을 갖는다. 어떤 거대한 힘에 의해 보이지도 않게 조금씩 망가져가고 있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 '다시 젊은이란 열차를' 첫 줄
이만큼 읽으니 어젯 밤 술로 조금 망가진 내가 이 책을 안 살 도리 없단 걸 깨닫고, 결제를 했다. 사장님이 그동안 쌓아둔 포인트로 결제를 해줬다. 다시 가게로 가는 길에 성심당 부띠끄에 들러 슈크림이 가득 들은 작은 케잌을 하나 샀다. 이런 게 필요한 날이다. 까닭 없이 쓸쓸해진 이 마음을 달랠 수 있을까 하는 희망으로 케이크를 사는 날. 먹어보니 소용은 없었지만.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로 보면 오늘도 망한 날이지만, 어제 기웃거린 문구점과, 서점과, 제과점과 가게를 정리한 점을 마음대로 이어가며 오늘을 그려대고 있다. 괜찮다. 출근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았다. 하기로 한 몇 가지 일을 하고 출근한다면 꽤 괜찮은 날이 될 것이다. 이 글을 다 쓰고 나면 이불속으로 숨어 들어갈까, 맘에 드는 시간을 만들어 갈까. 뭘 해도 구애받지 않기로 결심할까. 술의 중력을 거슬러 깨어나고 싶은데.
+ 오늘의 노래
못, 카페인
그 자리에 앉아 낙서를 했지
종이 위에 순서 없이 흘린 말들이 네가 되는 것을 보았지
난 숨을 참아 보다가 눈을 감았다가 또 손목을 짚어도
내 심장은 무심히 카페인을 흘리우고 있었지
늘 깨어 있고만 싶어 모든 중력을 거슬러
날 더 괴롭히고 싶어 더 많은 허전함을 내게
하루는 그리 길지도 않고 지루하다 할 것도 없는데
난 더 이상 기다리지도 않는데 난 더 이상 기다리지도 않는데
'늘 → > 오늘' 카테고리의 다른 글
230327 사랑의 역사를 읽다가 (2) | 2023.03.27 |
---|---|
230320 호박식혜가 달다 (1) | 2023.03.20 |
230311 차안에서 노래를 듣다가 (0) | 2023.03.11 |
230226 손잡이 있는 컵을 씻을 때 (4) | 2023.02.26 |
230218 와타시 아나타가 이루 우레시이 (0) | 2023.02.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