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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10.31
이불속에 쏙 들어가 있는데, 팬티를 만지다가(그냥 만져짐) 거꾸로 입었다는 사실을 알고 다시 뒤집어 입었다. 40살이 넘어도 팬티는 거꾸로 입을 수 있다.
친구가 동업하던 친구랑 싸워서 회사를 나갈 뻔했는데, 다시 얼추 화해하고 회사를 유지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방금 전화로 전했다. 그때 마침 라면이 먹고 싶어서 물을 올려놨었는데, 통화하면서 담배를 한대 피우니 식욕이 들어가 끓는 물을 껐다. 가 조금 전에 또 먹고 싶어서 불을 켰는데, 일기 쓰고 싶어서 컴퓨터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자나 또 식욕이 들어가서 끓는 물을 껐다. 회사를 운영하는 40살이 넘은 사람도 친구랑 싸우고 화해하고, 라면이 먹고 싶다 안 먹고 싶다 하는 변덕도 부린다...
2주 전엔 꿈에서 쉬를 했는데, 그러다가 어린이 때처럼 실제로 쉬를 할 뻔했다. 40살이 넘어서도 자다가 쉬를...
아까 오전 10시에(라고 쓰는데 낮잠을 한숨 자고 일어났더니 어제 일 같네) 필테 갔다가 끝나고 라하에 가서 커피를 마시며 간만에 상담 쌤이 매번 내주지만 매번 안 해가고 있는 일기카드를 꺼내 작성했다(40살이 넘어도 숙제를 안 해가....) 일기카드의 이번 주에 하고 싶은 일에 마음 챙기기라고 쓰고, 마음 챙기기를 하기 위해 할 일에다가 일기라고 썼더니 일기가 쓰고 싶어졌다.
아니 정말은 엊그제 일기에 외롭다고 썼는데 그걸 읽은 ㅎㅈ이 카톡으로 외로울 땐 시를 읽어봐.라는 말과 그때 보내준 시와, 그걸 읽던 가을 저녁의 담타시간이 좋아서 다시 쓰고 싶어졌다. 시도 읽고 싶어졌다. 그러니까 무엇을 ''한다''는 건, 무엇이 ''좋아졌''기 때문이다. 내가 운동을 하는 건 운동을 하고 나서 몸이 좋아졌기 때문이다. 내가 라하에 가는 건 커피 맛을 좋아하고, 커피를 마시고 나면 오늘 하루를 더 잘 살 수 있겠단 자신감이 들기 때문이다. 내가 시를 읽는다면 ㅎㅈ이 내게 보내준 '외로울 땐 시를 읽어봐'라는 말을 좋아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가 읽고 싶다.
엊그제는 정말.... 무슨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안개를 맞닥뜨린 것처럼.... 지나치게 날 덮친(이거 말고 표현할 길이 없는) 무력감 때문에 고심했다. 가만히 하루 반을 내내 누워 왜 무력감이 찾아왔나부터 시작해서, 어쩌다 내가 이렇게 된 건가 처지를 비관하다가 잠들고, 다시 깨면 이 무력감에서 어찌 빠져나갈까 고심했다. 하지만 고심은 무력감을 해소해주지 않았다. 겨우 겨우 출근을 했는데, 밤 12시 10분에 찾아와 글렌피딕 15년을 주문하며 작년에 첨 와서(그랬다면 12월이었을 것이다. 매년 슈톨렌이 나오면 사두니까) 내가 같이 준 슈톨렌과 글렌피딕을 같이 먹었을 때 느낀 맛을 잊지 못해 또 왔다는 그 해맑은 말이 나를 조금 깨웠다. 12월이면 또 슈톨렌이 나오니까 그때 다시 오라고 작별인사를 했다. 정말 오실지 모르겠지만, 이것만으로도 내가 슈톨렌을 준비해 둔 정성이 다했다. 앞으로도 매년 슈톨렌을 사두고픈 마음이 충분해졌다. 슈톨렌을 매년 사두고 싶다. 왜냐면 슈톨렌을 사두는 일이 좋아졌기 때문이다.
다음 날인 어제는 목이 말라.....보리차를 끓여 먹고 싶어.... 쌀쌀한 가을이자나....하면서도 귀찮아서 그대로 3시간을 자다가 친구 전화에(아까 회사 동업인과 싸웠다는) 깨서 통화하면서 보리차를 끓여 먹었는데, 그것만으로도 꽤 충분할 만큼 기분이 좋아져서 아 움직이니까 좋구나. 그랬다.
움직이고 싶어졌다. 움직이는 게 좋아졌으니까. 그러니까 뭔가 하려면 좋아져야 한다.
팬티를 거꾸로 입어도, 자다가 쉬를 해도(안 했지만...) 중요한 사람과 싸워서 모든 걸 버리고 싶어 져도... 아무 이유 없이 무기력해져 하루 반을 잠만 자도, 외로워져도.... 좋아하자. 보리차를 먹다가 들려온 새소리에 '내가 좋아하는 친구가 새를 좋아하니까...'하고 더 귀를 기울이다가 그 새소리를 자꾸 기억해보고 싶어지는 것처럼.....
그런데 여기서 문제?? 좋아지려면??????
결국 일기를 써야 시가 실린 메시지를 받고, 슈톨렌을 사놔야 슈톨렌을 사는 걸 좋아하게 된다는 건데.... 아니 가게 문을 열어야 슈톨렌을 사고, 그걸 작년에 먹은 손님이 다시 와서 또 그걸 먹으려면 여전히 가게문을 열어놔야 한다는 건데.... 그러니까.... 일기 쓰는 창을 열고, 가게 문을 열고, 보리차를 끓이러 일어나고, 아니 먼저 친구한테 전화가 와야 하고, 친구한테 전화가 오려면 친구가 일단 동업인하고 싸워야 하고, 일기를 쓰려면 일단 사무치게 외로워져야 한다. 그러니까 들뢰즈가 말한 것처럼 사건이 생겨야 한다.
그러니까 아직 발생하지 않은 사건의 잠재성을 안고, 내게 발생한 사건을 견뎌가는 과정을 삶이라 인지하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침대에서 나와 움직이자...... 는 교훈적 결말.........(위 글을 갑자기 들뢰즈가 말하는 '사건'의 정의가 존나 복잡했다는 걸 깨닫고 대충 검색해서 들고 옴)
자고 일어나니 ㅎㄴ한테 요즘 어떻게 지내냐는 카톡이 와있었다. 사실 아까 일기카드를 쓰다가 다이어리라는 것도 천년만에 펴 들고 10월 달력란에 기억나는 걸 적어봤다. 그게 바로 내게 일어난 사건이고, 내가 좋아한 일들일 것이다(싫은 일들도 적었지만....) 서울 다녀온 일, ㅅㄹ이 만나서 ㅎㅈ이를 만나 양지공원을 걸으며 고양이를 보고(장기자랑을 하고) 귀여워 한일, ㅁㄱ이 가족이 다녀간 일, ㄱㅁ이가 1시까지 문을 열어두는 게 어떠냐고 그래서 내년의 다짐으로 설정해 놓은 일.... ㅎㄴ한테를 이런 얘기를 구구절절하게 하지 않았고, 좀 쓸쓸했지만 이것 또한 가을인가 싶다고 그랬는데, 가을이니까 또 걷자는 답장이 왔다. 조만간(좀 서둘러야 할 것. 가을은 짧으니까) 걸을 것이다. 걷는 게 좋아졌기 때문이다. 걷고 싶어 졌기 때문이다.
엠피플 사장님이 어느 날 슬며시 '여기 들어와...' 하면서 공유해 준 오픈채팅방이 있는데(무슨 밴드 같은 건가... 올드해... 하면서 들어감) 그 방에 있는 사람들은아무 말 없이 노래만 올린다. 사실상 알림 숫자를 지우듯 들어갔다 나오는 방이 되었는데, 몇 주전 집에 오는 밤에 성모 오거리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다가 제목을 보고 듣게 된 고독한 엠피플 방에서 플레이해본 최초의 노래가 역시나 너무 올드하고... 도 너무 좋아서 10월 플레이리스트에 넣어두고 계속 듣고 있음.... 그것 역시 가을이 아닐까 싶고요..... 근데 또 이걸 올린다고 찾아보다가 뮤비를 보게 되었네요..... 좋아..... 좋아서 찔끔 울었다.....
https://youtu.be/SV_6_RmvYNw?si=QDMkMmjQ-JRL_SG1